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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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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어릴 적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기분 탓일 수 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일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872년 11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 마을 르아브르.

"끝났다." 한 남성이 토해내듯 한 마디를 내뱉고는 침대로 풀썩 쓰러집니다. 상기된 채 거친 숨을 연신 내쉽니다. 그의 힘 풀린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온 붓은 마룻바닥 위를 또르르 굴러다닙니다. 이 사람은 몇 시간 전부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 합니다. 아주 단단히 홀렸던 모양입니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봅니다. 겨우 몇 가지 잔상만 떠오릅니다.

눈을 떴을 때는 얼추 오전 7시30분 정도였습니다. 르아브르 항을 훤히 볼 수 있는 라미라우테 호텔 3층 방 침대였습니다.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기억이 선명했습니다.

'그래. 빛. 정말 최고의 빛을 봤었는데….' 그는 방 안으로 차츰 밀려오는 빛을 본 뒤 자아를 잃었던 겁니다. 그려야 한다. 이 인상을 꼭 담아야 한다.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붓을 쥐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캔버스를 허둥지둥 꺼냈습니다.

밀물 같이 찾아온 빛은 곧 썰물처럼 빠져나갈 듯했습니다. 차오르는 벅찬 마음도 함께 옅어질 듯했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의 손이 캔버스를 갖은 색채로 채운 후였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자신이 무아지경(無我之境) 상태로 그린 이 그림을 소중히 챙깁니다. 그리고 그는 이 작은 작품 하나로 인상주의 시대의 개척자가 됩니다.

해돋이의 ‘인상’을 담다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

이른 오전 깨어나고 있는 르아브르 항구의 모습입니다. 찰나의 빛이 만든 풍경이 순간 포착돼 담겼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해가 뜨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그런 해가 뿌린 빛의 파편들이 일렁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조각배를 몰고 있습니다. 안개 뒤로 보이는 공장들도 증기를 뿜으며 바쁘게 돌아갑니다.

화폭에는 빛의 가장 역동적인 순간이 그려졌습니다. 이 풍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본다면 위로는 안개를 뚫고 나오려는 햇빛, 아래로는 휘몰아치는 윤슬 덕에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듯합니다.

붉은 빛의 하늘, 푸른색의 바다는 묘한 대조도 이룹니다. 새벽 공기 냄새, 바닷가의 물결 소리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바닷가를 걸은 적이 있다면 더 와닿을 그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늘한 새벽에 내리쬐는 빛줄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지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도 울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길지 않습니다. 해는 더 높이 올라서고 빛은 끊임없이 자리를 옮깁니다.

해의 위치, 빛의 강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특별했던 그 풍경은 다시 평범해집니다. 모네는 그런 점을 잘 알았습니다. 모네는 이러한 '시간의 습격'이 오기 전, 자신이 받은 특별한 인상을 그대로 이 그림 '인상, 해돋이'에 담았습니다.

뭘 이런 걸 그려놨어…“인상주의자들!”

그런데요. 모네가 이 그림을 처음 내걸었을 때는 "쓸데없는 걸 그려놨다"는 평을 실컷 들었습니다.

1874년 모네는 프랑스 파리에서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등과 함께 첫 번째 합동 전시회를 엽니다. 1872년 르아브르의 호텔에서 홀린 듯 그렸던 해돋이 그림, 모네는 그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전시 담당자의 "그림 제목이 너무 평범해요"라는 말에 '인상'이란 말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인상, 해돋이'가 됐습니다.

결과는요. 혹평이 이어졌습니다. 가장 아프게 때린 이는 '르 샤리바리'지의 기자 루이 르루아였습니다. "벽지의 첫 스케치도 이 풍경화보다는 더 완성된 느낌이겠다", "인상이라고? 나도 인상을 받았다.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단지 인상만을 그렸다!"는 등 조롱을 쏟아냈습니다.

시간 낭비했다고 느낀 르루아는 모네와 그의 친구들을 향해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m)"이라고 비꼬았죠. 인상주의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리 좋은 어감이 아니었던 겁니다.

우아한가? NO! 정교한가? NO!

아직은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1863년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기성 화단에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들 사이에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같은 그림이 높은 점수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같은 작품에 나름의 팬덤(fandom)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구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들라크루아는 18세기 말부터 유럽 모든 나라에 번진 낭만주의, 쿠르베는 이에 대한 '카운터' 격으로 등장한 사실주의의 대표자입니다. 지금이야 상당수의 교양 서적이 미술사조의 순서를 '낭만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 특히 기성 화단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다음으로 어떤 화풍이 시대를 지배하게 될지 점칠 수 없었습니다.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의 그림을 보면(물론 두 작품도 서로 매우 다르지만) 당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얼마나 생뚱맞은 작품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처럼 우아하지 않습니다. 쿠르베처럼 정교하지도 않습니다.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확대본)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확대본)

기성 화단의 눈으로 볼 때 '인상, 해돋이'는 무엇 하나 제대로 묘사된 게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해는 붓으로 푹 찍어 그린 듯했습니다. 항구에 뜬 배는 푸른 선으로 찍찍 그어 표현한 듯했고, 나룻배를 탄 사람들은 검푸른 선으로 거칠게 구현한 듯싶었습니다. 투박한 붓질도 그대로 보이고요. 아직 해가 덜 뜬 새벽, 그러니까 여전히 어두울 시간인데 검은색이 없다는 점 또한 의아했습니다.

그 시대에서 목소리 좀 낸다 싶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못 그렸는데 자꾸 잘 그린 척한다", "고작 지저분한 항구 풍경에 붓질 몇 번 쓱쓱 하고 폼 잡는다"는 말을 했을 법도 합니다. 모네 또한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의 화풍에 상당한 영향을 받기는 했습니다. 다만, 특히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를 두고는 "이렇게 그려야겠다"보다는 "이렇게는 그리지 말아야겠다" 정도를 더 느낀 듯합니다.

그 시대의 주류 미술을 배운 적 있는 모네는 왜 비난받을 게 뻔한 '인상, 해돋이'를 세상에 내놓았을까요. 모네는 심지어 주목받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그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모네의 생을 돌아보면요. 그가 신에게 세 가지 정도의 선물을 받았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신의 선물① : 인연
클로드 모네, 베레모를 쓴 자화상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유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습니다. 모네의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꽤 괜찮은 상인이었습니다. 모네는 아버지가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관심 밖이었습니다. 모네는 그림이 좋았습니다. 자연도 좋았습니다. 틈나면 노르망디 바닷가로 갔습니다. 제멋대로 달라지는 날씨, 이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세기가 자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봤습니다.

그림에 나름의 재능도 있었습니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모네가 캐리커처(caricature) 주문 제작으로 나름 용돈을 쏠쏠히 벌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외젠 부댕, Shore of Trouville

모네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이는 그의 고모였습니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일대 젊은 화가들을 후원하던 고모는 조카의 재능을 꽃피울 과외 교사를 섭외합니다. 부댕입니다. 훗날, 1889년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받는 풍경 화가입니다. 부댕은 모네에게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낚아채 캔버스에 담는 기술을 알려줍니다. 모네는 이후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됐다면 이는 모두 부댕 덕"이라고 할 만큼 그에게 존경을 표했습니다.

1859년. 청년 모네는 프랑스 파리의 사립 예술학교 '아카데미 쉬스'로 갑니다. 이 또한 고모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네는 1년 뒤 군에 끌려가는데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 주둔하게 됩니다. 7년짜리 복무였습니다. 모네는 어쩐 일인지 거기서 장티푸스에 걸려 1년 만에 군복을 벗습니다. 이때 제대 비용도 물론 고모가 대줬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 등 젊고 도발적인 화가들과 놉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붓을 쥐게 된 모네는 이들과 소통하며 자신이 꿈꾸는 발칙한 화풍에 확신을 갖습니다. 1863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본 뒤 "역시 역사화만이 정답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신의 선물② : 격동하는 시대

1870년. 모네는 막 불이 붙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 전쟁)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갑니다. 그런데요. 모네는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삶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터너와 컨스터블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 겁니다. 모네는 색채가 넘실대다 못해 몰아치는 두 사람의 작품을 뚫어져라 봅니다. 주변 사람들이 "뭘 그렇게까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큰 감명을 받습니다.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존 컨스터블,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이후 파리로 다시 온 모네는 본격적으로 작업실 밖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어릴 적 노르망디 바닷가에서 알게 된 사실을 다시 새깁니다. "물질은 본질적인 고유 색상을 가진 게 아니다. 물질의 색은 빛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시대를 강타한 산업혁명의 결과물 중 일부였던 사진기와 튜브물감도 모네의 각성을 부추깁니다. 모네는 기성 화단이 옛 거장의 그림들을 베끼면서 공부할 때 '이제 사진기가 있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똑같은 그림만 그려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튜브 물감은요. 모네를 마음껏 밖으로 쏘다니게 해준 발명품이었습니다. 뚜껑이 있는 튜브 물감은 어딜 나간다고 해도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모네 이전에도 작업실에서 벗어나야 그림을 더 생생히 그릴 수 있다고 본 화가는 꽤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감히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물감을 주로 돼지 방광에 넣어뒀는데요. 당연히 쉽게 터지고 빨리 상했습니다. 튜브 물감이 생기기 전 화가들은 자연의 변덕에 감히 맞설 수 없었습니다.

신의 선물③ : 타고난 우직함

"저는 서로 다른 효과를 내는 연작(聯作)에 매달려 있어요. 일할수록 절실히 느낍니다. 제가 바라는 걸 찾으려면 한층 더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는 겁니다."

모네의 바위 같은 우직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말입니다. 어떤 시련에도 쉽게 무릎 꿇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불화, 극단적 선택까지 부추긴 빈곤, 비평가의 조롱,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 모네는 이 모든 일을 우직하게 버텨냈습니다.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연작)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연작)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모네는 시련을 잊기 위한 수단인 양 빛에 집착합니다. 모네는 빛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연작물 '건초더미'를 볼까요. 모네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달라지는 빛에 따라 같은 걸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점심, 저녁, 해가 쨍쨍할 때, 구름이 떠다닐 때, 비가 올 때, 눈이 올 때, 빛의 세기가 달라질 때마다 그렸습니다. 이 덕분에 웬만큼 유명한 미술관은 모네의 연작 하나씩은 다 갖고 있습니다.

모네는 심지어 1879년 아내 카미유의 임종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빛을 관찰합니다. 모네는 훗날 자신의 후원자였던 클레망소에게 고백하지요. "아주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지켜본 일이 있네. (…) 그런데 그 비참한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빛과 그림자 속에서 드러난 색을 구별하고 있었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시대는 결국 모네 편에 섭니다.

당시 귀족 계층들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버텼습니다. 그림은 귀족들의 문화였습니다. 무시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귀족과는 다른 취향을 추구했습니다. 자본가들은 마치 자신들처럼 새롭게 태어난 모네의 그림을 품습니다. 인상주의의 도전에 공감하고 지지를 표합니다. 모네와 그의 친구들을 돕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위상은 높아집니다.

돈이 움직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줄타기를 하고 있던 미술사도 인상주의의 바다에 풍덩 빠집니다.

대중들도 그림 속 빛의 변화를 즐기기 시작합니다. 붓을 든 당시 화가의 눈이 돼 그림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림 속 풍경 자체가 아닌 풍경이 뿜어내는 감각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신과 영웅의 존재, 재현의 완성도는 그림의 가치를 매기는 우선순위에서 차츰 멀어졌습니다. "역사화가 최고, 풍경화는 최저"라는 고정관념에 금이 갑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그렇게 '귀하신 몸'이 됩니다. 현 시대 전문가들은 모네의 이 그림에 대해 미술사적 중요성을 따져 3억달러(약 3300억원) 내외로 값을 추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인 겁니다.

모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격동의 시기, 마네와 모네는 헷갈리기 쉬운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이렇게 볼까요. 마네가 인상주의의 문을 열었다면 모네는 문틈이 보이자마자 깃발을 들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기수 중 한 명 정도로요. 확실한 건 둘 다 선구자로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 두 사람은 알파벳 철자도 비슷합니다. 마네(Manet)와 모네(Monet)로 한 글자 차이입니다. 심지어 그 시대에도 마네와 모네를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까칠했던 마네답게 처음에는 후배인 모네와 혼동되는 일을 불쾌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모네와 만난 후 뜻이 통했는지 거의 평생을 교류할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모네는 마네의 대표작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따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마네에 대한 지지 표명이었습니다.

백내장, ‘자신만의 풍경’으로 승화

돈도, 명성도 충분해진 모네는 지극히 모네다운 말년을 보냅니다.

클로드 모네

1883년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집을 옮긴 모네는 그곳에서 평생 삽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내가 다음에 큰돈을 벌면 지베르니에 집을 얻겠어"라고 말했었지요. 건초더미, 생 라자르 역 등 온갖 것에 집착했던 모네는 여기에선 수련에 제대로 꽂힙니다. 모네가 인생 후반부에 그린 수련 연작은 250여점 이상으로 알려졌습니다.

평생 빛을 연구한 모네는 그쯤 백내장을 앓습니다. 늘 맨눈으로 빛을 뚫어져라 본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상 예고된 직업병이었지요.

클로드 모네, Water Lily Pond
클로드 모네, Water Lilies and Japanese Bridge

모든 게 안개가 낀 양 흐릿해 보이는데도 개의치 않습니다. 때로는 혼탁해진 수정체로 볼 수 있는 '자신만의 풍경'에 열광키도 합니다. 모네는 죽기 1년 전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모네가 남긴 마지막 작품 몇 점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끝까지 자기 생명력을 불태웠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1926년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눈을 감습니다. 86세 나이였습니다.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의 동료 세잔의 말이었습니다.

〈참고 문헌〉

「CLAUDE MONET」, Christoph Heinrich, TASCHEN

「모네 : 빛과 색으로 완성한 회화의 혁명」, 허나영, 아르테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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