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대기업체제 반성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경제논리로 풀 수 없다는 걸 잘 알텐데, 결국 불러놓고 청와대가 하고 싶은 말만 한 것 아닌가”
지난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진행된 경제계 주요인사 초청간담회에서 흘러나온 의제들을 받아 든 기업인들의 솔직한 심정은 이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해결 방안을 논의하자며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총자산 10조원 이상 30개 대기업을 불렀다. 사태 장기화를 대비해 정부와 기업이 보조를 맞추며 총력 대응에 나서는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애로사항을 ‘듣는 자리’였다는 청와대의 평가와 달리, 자리에 참석했던 기업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을 주문했다. 주요 기업들 간 공동 기술 개발, 대·중소기업 간 부품기술 국산화 협력 확대 등을 통해 이번 위기를 한국 경제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 계기로 삼자고 촉구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에게 새로운 주문이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며 “위기를 촉발한 것은 한일 외교의 실패인데, 관련 내용을 보니 결국 기업들이 더 분발하라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사안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등 양국 간 과거사 문제 해결이라는 외교 문제에서 촉발된 만큼, 기본적으로 정치·외교 분야에서 협의 채널을 가동해야 한다는 게 경제계의 일관된 시각이다.
특히 기술개발 특정국의 의존도를 낮추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간,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을 강조한 청와대의 의중에, 당사자인 기업들에서는 결국 다시 “대기업 체제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일고 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같은날 중소기업중앙회를 찾아 다시 한 번 이를 강조하면서 기업들의 답답한 마음은 더욱 증폭됐다.
그는 문 대통령과 대기업 간담회에 나온 이야기들을 언급하며 “기존의 폐쇄적 수직 계열화 체제에서 앞으로는 중소·중견 기업이 협력 파트너로서 함께 연구·개발하고 공급과 수요가 이뤄져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한 기업의 관계자는 “빠른 시일 내에 생산 차질이 불가피해질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당장의 대책을 찾기보다 장기적인 경제 구조 개혁을 강조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라며 “결국 기업인을 불러다놓고 하고 싶은 말만 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민관 공동 대응’을 일본에 대한 단호한 액션플랜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정부와 청와대 전략에 대한 회의론은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다. 청와대가 대기업에게 ‘숙제’를 던진 순간 기업은 일본과도 우리 정부와도 모두와 갈등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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