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조민선 기자]안철수 원장의 대선출마를 가정할 때, 여야에 소속되지 않은 제3의 지대를 구축해 독자적으로 출마하는 방식도 거론되고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주요 대선마다 제3후보는 있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 등장은 화려했지만 퇴장은 쓸쓸했다. 레이스를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본선 성적표도 초라했다.
가까이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던 2007년 대선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말고도 문국현 후보가 있었다. 문 후보는 유한킴벌리 대표 출신으로 깔끔한 기업 이미지를 자산으로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마지막까지 후보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노력했지만 단일화 방식을 둘러싼 이견을 끝내 좁히지 못했다. 8월에 대선출마를 선언한 문 후보는 두달후 창조한국당을 창당, 독자 출마했다. 문 후보는 완주했지만 불법 증여 논란 등을 넘어서지 못하고 5.8% 득표에 머물렀다. 독자 정치 세력화까지 이뤘지만 양자 구도가 굳어지면서 의미 있는 제3후보가 되지도 못한 것이다.
같은 시기 고건 전 총리는 급부상했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고 전 총리는 한때 지지율 30%를 웃도는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반노(反盧)-비(非)한나라 성향 유권자 표심을 당기기 좋은 후보로 인식됐다. 하지만 정치 현안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지지율이 급전직하하자 도망치듯 불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에게 2007년 대선은 경쟁력 있는 제3후보를 영입하지도, 제3후보와 연대하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낭비한 끝에 참패한 선거였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정몽준 당시 무소속 의원이 한일월드컵 열풍을 타고 제3의 후보로 등장했다. ‘국민통합21’이라는 독자정당을 만드는 등 대선행보를 이어가다 선거막판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단일화 파기’를 선언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본선에는 나서지 못했다. 1992년 대선은 고 정주영 전 현대건설 회장이 국민당 후보로 출마, 16%를 득표했지만 낙선했다. 박찬종 후보는 ’바바리 바람’을 일으키며 92년과 97년 대선에 잇따라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초반에는 기세가 좋았지만 세(勢)를 규합하지 못하면서 6%지지에 그쳤다.
제3후보 실험이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당장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시민후보는 박영선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 경쟁에서 승리, 시장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선에서는 주요 정당 소속이 아닌 제3후보가 당선된 예는 없다.
안 원장의 선택은 복잡해 보이지만 길은 네 개 뿐이다. 불출마, 정치세력화 후 후보 단일화, 독자 완주, 그리고 기존 정당 입당. 한국정치사는 어떤 선택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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