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기존 정치권 불신풍조 속 대안 급부상…베를루스코니 伊총리·허먼 케인 美공화당 대선주자 잇단 수난
기업CEO는 선한 독재자소통·인사방식 달라
나라 이끌 지도자론 부적절
강점인 경제서도 낙제점
美 허버트 후버 前 대통령
태국 탁신 前 총리 등
역사적으로도 실패 결론
한국 첫 CEO 대통령 MB
임기말 박해지는 평가
여당도 정치력 한계 지적
#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1994년 처음 총리 집권 이후 17년간 이탈리아 정치를 쥐락펴락해왔다. 그의 장수 비결에는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그룹 미디어셋의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다. 무려 51번의 신임투표에서 살아남으며 정치생명의 끝이 보이지 않던 베를루스코니는 그러나 유럽 재정위기의 파고 속에 그의 시대를 허무하게 마감했다.
# 내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 공화당 후보에 도전장을 던진 허먼 케인 갓파더스(피자 체인) 전 CEO는 최근까지도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며 일약 정가의 돌풍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최근 연이어 터져나온 성추행 연루 의혹은 CEO 출신으로서의 그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남기며 대권가도를 가로막고 있다.
한때 낡은 정치의 대안, 21세기형 리더십의 새 모델로 주목받던 ‘CEO 출신’ 정치 지도자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CEO 출신 정치지도자들은 정계 입문 때부터 기존 정치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등에 업고, 자신의 탁월한 경영 감각이 나라 경영에서도 빛을 발할 것이란 여론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곤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CEO 출신 정치 지도자들의 잇따른 낙마와 추문은 ‘성공한 CEO가 성공한 대통령으로 가는 지름길은 아니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입증하고 있다.
미 정치전문 웹사이트 ‘제 3의 길’은 최근 기업인의 리더십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유효할 것인가를 분석하며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냈다. 기업과 국가를 이끄는 리더십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설명이다.
정치 평론가 빌 슈나이더는 이에 대해 “기업의 CEO가 선의의 독재자라면 대통령은 혼돈의 민주주의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리더”라고 개념 규정했다.
미국의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WP)도 CEO와 대통령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 ▷소통하는 방식 ▷인사 등 통제 방식에서 눈에 띄는 차이를 보인다고 전했다.
CEO는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대통령은 국내외 현안에서 찬성여론은 물론 반대파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또 기업의 소통방식은 대개 위에서 밑으로 흐르는 일방향이 기본 시스템이지만, 정치 지도자의 경우 쌍방향 소통 없이 사회 통합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이 밖에 CEO들은 자신의 평가에 따라 직원들의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국회와 국민 여론 등의 견제 속에서 인사 통제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처럼 성과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기업 CEO와 사회통합이 우선 과제인 대통령의 지향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디어그룹 포브스의 스티브 포브스 CEO와 부동산 회사 트럼프그룹의 도널드 트럼프 CEO가 지난 2000년과 올해 공화당 경선에서 각각 도중하차한 것은 CEO와 대통령의 리더십 차이를 인식한 결과라고 WP는 보도했다.
앞서 지난 1992년 대선에서 18.9%의 득표율로 무소속 바람을 불러 일으킨 페로시스템의 로스 페로 CEO는 1996년 대선에 연거푸 나왔으나 득표율이 8.4%에 그친 바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31대 대통령(1929~1933)을 역임한 허버트 후버가 대표적인 기업인 출신이었다.
그는 지금도 역대 최고의 상무장관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대통령으로서는 역대 최악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경제 대통령’ 이미지로 집권에 성공한 후버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의 위기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기업가적 마인드와 경제적 낙관론만 주장하다가 결국 미국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CEO 출신 지도자들이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데는 기성 정치인 못지 않은 도덕 불감증도 한몫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성과 지상주의가 몸에 밴 나머지, 과정의 중요성과 페어플레이 정신을 간과한 데 따른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재정위기 악화에 따른 전방위 사임 압력을 받기 전에도 이미 50번이 넘는 신임투표를 받았다.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별명답게 재임 기간 내내 비밀 파티와 숱한 성추문, 비리 의혹 등으로 도덕성 부재와 무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탁월한 경영 기법과 금융 감각, 결정력을 갖춘 기업 리더로 승승장구하던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허먼 케인의 발목을 잡은 것도 성추행 의혹이다.
자수성가한 태국 최고의 억만장자 CEO 출신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인 탁신 태국 총리 역시 부정축재와 권력 남용 등 부패 혐의로 쫓겨났다.
지난 2006년 군부 쿠데타로 탁신이 물러나자, 국민의 80% 정도가 쿠데타 세력에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로 탁신의 주변에는 부패의 그늘이 깊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 최초의 CEO 출신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임기가 더해갈수록 박해지고 있다.
특히 여당인 한나라당에서 CEO 대통령의 정치력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자의 유세지원단장이었던 권오을 국회 사무총장은 최근 펴낸 자전적 에세이 ‘꺼벙이의 꿈’에서 “이 시점에는 CEO 대통령이 맞겠다고 판단하고 처음부터 이명박을 택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기업경영과 국가경영은 진짜 다르구나란 생각을 한다”고 털어놓았다.
권 사무총장은 “기업가 대통령은 한 번의 경험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라며 “이제라도 국민과의 소통이나 반대편과의 소통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길 기대해 본다”고 했다.
앞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7월 당 대표 당선 후 한나라포럼 강연에서 “이 대통령은 정치인 출신이 아닌 CEO 출신으로 회사 경영하듯 국가를 경영하고 여의도와 거리를 멀리했다”며 “3년 반 동안 밤 12시에 주무시고 새벽 4시에 일어난 대통령은 해방 이후에 거의 없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정치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춘병 기자@madamr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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